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운주성 전투 (문단 편집) === [[태조 왕건]] === [youtube(SDbA6T9vTP8)] 드라마 [[태조 왕건]]에서 '운주성 전투'의 묘사는 179회에서 183회 사이로 '''드라마에서는 '운주 전투'라고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여기서 70세에 가까운 [[견훤(태조 왕건)|견훤]]의 무기력함이 제대로 나온다. 한 때, [[서라벌]]까지 침공해 [[경애왕]]을 시해하는 동시에 [[경순왕]]을 [[서라벌]]의 새 임금으로 세우는 것으로도 모자라 [[고창 전투]] 전까지는 왕건을 밀어붙었던 백전노장 견훤은 이 무렵 자식들 간의 왕위 계승 문제와 연이은 패전으로 인한 스트레스로 인해 등에 [[종기|욕창]]이 생기는 등 말 그대로 노쇠해진 상황이었다. 급기야는 요양을 권하는 의원 훈겸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중요한 전투라며 노구의 병든 몸을 이끌고 무리한 출정을 감행한다. 이때, 등창으로 고생하는 와중에도 신료들[* 특히, 이찬 [[능환(태조 왕건)|능환]]을 가장 신경쓰였다.]이 오자 위엄을 잃지 않으려는 눈물겨운 모습을 보여주는 건 덤. 한편, [[왕건(태조 왕건)|왕건]]은 [[예성강]]에서의 [[후백제]]군의 기습에 고려 수군이 전멸되고, 황도 [[개경]]까지 농락당하는 타격을 받고 나서, 잠시 곡도로 귀양을 가 있던 [[유금필(태조 왕건)|유금필]]을 다시 불러오긴 했지만, 그 와중에 신동이면서 고려의 모든 전략을 맡았던 [[최응(태조 왕건)|최응]]이 34세라는 젊은 나이로 진작 병이 악화되어 [[요절]]하는 등 견훤보다는 덜하지만, 역시 운이 좋지 않았다. 아무튼, 유금필은 복귀하자마자 '정남대장군'을 맡아서 총사를 담당하게 되었고, 최응의 뒤를 이어 [[병부령]]을 맡은 [[배현경(태조 왕건)|배현경]]이 운주 전투에서 백제 왕의 친정이 예상된다고 하자 왕건이 '''"백제의 왕이 나온다?! 허....허면 나도 가야지! 백제의 왕이 나온다는데 짐이 꼭 가야 하오!"'''라고 반사적으로 나온다. 이에 시중 [[김행선]]이 만류하자 황도는 정윤 [[혜종(고려)|왕무]]에게 맡겨놓고서라도 자신이 직접 가야 한다고 고집을 부렸다. 군사 훈련[* 다만, [[고려]]군의 군사 훈련은 과거 [[태봉]] 시절 군사 훈련의 영상들을 짜집기 하였다.] 이후에 양국의 군대가 비슷하게 늦가을에 출병을 했는데, 모두 운주까지 오는 동안 곤란을 겪는 것으로 묘사되었다. * [[후백제]]군은 견훤의 등창으로 인한 건강 악화와 강풍을 동반한 겨울비 이후의 추위으로 인해 행군이 계속 지연이 된 채 야영을 나흘 동안 했으며, 특히나, 견훤의 환후를 들은 [[금강(태조 왕건)|금강]]이 '''"우리는 겨울 준비조차 안 했다."'''라는 말로 미루어보아, [[후백제]]군은 매우 급하게 준비를 하는 듯 보였다. 금강이나 최승우, 박영규, 김총 등이 물러나 다음을 기약하자고 했지만, 그래도 진군을 해야 하는 견훤과 이번을 기회로 왕위 계승에 대해 종지부를 찍으려는 신검 형제의 생각이 맞아 떨어지면서 늦게나마 출정을 하게 되었지만, 결국 이로 인해서 거리상 [[고려]]군보다 가까웠어도[* [[후백제]]의 왕도인 완산주(현재의 [[전주시]])에서 운주(현재의 [[홍성군]])까지는 현 지명을 기준으로 보면, 익산과 군산을 지나 금강을 건너고, 서천, 보령(대천)을 지나면, 홍성이다.] 고려군보다 매우 늦게 도착하였다.[* 아직 [[후백제]]군이 당도하지 못했다는 전의성주 이치의 말을 듣고, 왕건이나 유금필마저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 [[고려]]군 역시 송악([[개성시|개성]])에서부터 이동하던 중에 [[이천시|남천현]]에서 폭우로 발이 묶이게 되었다.[* 사실 드라마에서 남천현이나 이후 등장하는 금강을 경유한 것은 현재 이천 지역이나 [[이천 서씨]], [[전의 이씨]] 집안에서 전해져오는 왕건의 남정 관련 설화를 여기에 갖다 붙인 것인데, 경로상으로 보면 운주성 전투가 아니라 캐삭빵 대원정으로 진행되어 일정에 다소 여유가 있던 [[일리천 전투]]에 붙이는 것이 나았을 것이다. 오늘날의 시점에서 보면, 지금은 [[북한]]에 있어서 가늠할 수는 없지만, [[개경]](현재의 개성시)에서 운주(현재의 [[홍성군]])로 가려면, 일부러 남천현(현재의 [[이천시]])을 거치지 않고, 현 지명을 기준으로 보면, 파주와 서울을 통해 [[한강]]을 건너고, 이후 수원, 평택, 천안, 아산(온양), 예산을 거치면 된다. 이 길이 어쩌면 고려군이 가장 빨리 도착할 수 있는 길이긴 하다. 물론 181회에서 고려군이 남천현에서 묶였을 때, [[홍유(태조 왕건)|홍유]]의 말처럼 거리로 보면, 상술된 [[후백제]]군의 경로가 고려군보다 더 짧다. 실제로는 저런 최단거리를 경유하기가 어려웠을 수도 있다. 전근대에 기병까지 다수 포함한 연대급 병력이 도강하기에는 서울 한강은 너무 넓고, 보다 후대의 조선시대에도 강변의 도시들은 넓은 하구 평야보다는 도강이 용이한 중류쯤에 자리잡는 것이 보편적이었다. 당시 한강 인근에 도시다운 도시는 중랑천 동쪽에 있던 양주나 현 하남 지역으로 추정되는 한주 정도였고, 이 두 지역 사이는 [[잠실도]]가 육교 역할을 해 기병 정도는 갈수기에 직접 도섭도 가능했을 것이다. 사실 기록상으로는 드라마의 묘사처럼 다급한 타이밍 러시가 아니라 오히려 왕건이 먼저 운주를 공격하기 위해 출정하니 견훤도 뒤따라 나선 쪽이었으니, 먼저 출정한 왕건 쪽이 잠실을 통해 한주를 경유한 뒤 옛 [[양길]]의 핵심 영지였던 남한강 일대를 위무하며 진군했을수도 있다.] 그러다가 [[최지몽(태조 왕건)|최지몽]]이 '''"틀림없이 두 귀인을 만날 것이다."'''라는 예언에 고려군 내부에서는 반신반의하기는 했지만, 그 직후에 [[전의면|전의]]성주 [[전의 이씨|이치]]의 부탁을 받고 온 남천현의 명문 호족 출신인 [[이천 서씨|서목]]의 도움으로 무사히 남천(南川)을 빠져나오게 되었고[* 처음 서목이 자신이 왜 여기로 왔는지를 밝힐 때, 고려군 수뇌부들은 안도하면서 흐뭇해했는데, 이후, 서목이 "오늘 신이 여기 오지 않았다면, 강물이 넘쳐서 페하의 군대는 모두 물귀신이 될 것입니다!"라고 경고를 할 때, 다들 깜짝 놀라면서 잠시 동안 멈칫하였다. 오죽하면 남천을 건넜을 즈음에 나레이션으로 '[[구사일생]]'이라고 표현했을까? 덧붙여 이때 도움을 받은 왕건은 이후 남천현을 '이섭대천(利涉大川)'에서 따온 이천이라고 이름을 새로 붙여 지금의 이천시가 됐다고 알려준다. 여담으로 서목은 바로 그 [[서희]]의 조상이기도 하다. 다만 이게 운주성 전투 때의 일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이후에는 전의성주 이치가 직접 자신의 휘하 정예병을 이끌고 와 합류하면서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였다.[* 여담으로, 양 군의 대화로 보면, 운주의 지형은 [[안동시|고창]]과 맞먹는다고 하면서 먼저 선점하는 쪽이 유리한 상황을 맞게 된다고 한다.] 물론 고려군은 북쪽에 있는 송악 등지에서 이동을 하다 보니 추위에 매우 강했다. 문제는 견훤은 등창으로 인해 말을 타는 것조차 몸에 무리가 갈 정도로 심신이 말이 아닌 상태였다는 것. 기껏 전장에 도착했지만 춥고 서릿발과 비가 오는 등 악천후에 더해 역병마저 돌게 되고, 백제군 병사들의 사기도 바닥을 치고 있는 중 아무튼, 견훤의 건강이 좋지 않은데도 무리하게 행군을 하던 후백제군[* 182회 초반에 후백제군이 운주로 들어오는 것을 보고 온 전령의 보고를 들은 왕건은 '''"견훤 왕이 마차를 타고 올 위인인가? 그것도 이 산악전에?"'''라면서 놀란 반응을 보인다.]은 운주에 늦게 도착한데다 급하게 출전하면서 추위에 대비하지 못하면서 운주에 머무는 동안, 군사들이 [[동사]](冬死)하거나 탈영을 하게 된다.[* 방영분을 보면 후백제 병사들이 추위에 픽픽 쓰러지고, 탈영 장면을 보면 어디론가 정처없이 좀비처럼 도망가는 장면이 소름돋을 정도로 추위에 지친 병사들을 표현 하였다. 오죽 열이 간절하면 보초병들이 조명용으로 들던 횃불이라도 쬐려 안간힘을 쓴다. 아무리 그래도 이 정도일까 싶겠지만 실제로 충청권에서 전라/경상권만 내려가도 체감온도가 확 올라간다.] 악화된 상황에 조물성 때처럼 화친을 시도했지만, 고려군 수뇌부는 이를 무시함과 동시에 공격을 준비하게 되었고, 결국, 신검을 중심으로 한 후백제군의 중추는 싸우면서 회군을 하려고 했지만, 삼면을 에워싼 고려군의 공격으로 박살이 나면서 퇴각을 하다가 군사 종훈이 화살을 맞으면서 생포가 되었다. 한편, 전투가 시작 되기 전 견훤은 낡은 수레에 몸을 숨기고, 군졸의 옷으로 갈아 입은 금강과 최승우, 박영규와 함께 도망[* 이는 [[공산 전투]] 당시 왕건이 당했던 그 굴욕을 그대로 닮은 것이나 다름이 없다.]을 치게 되는데, 이미 후미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전의성주 이치의 추격을 받으면서 [[기신|미끼용 어차를 몰고 가던 용장 최필이 전사]][* 사실, 그는 이미 스스로 자청해서 미끼용 어차를 끌고 싸우던 중에 이치(다만, 영상을 자세히 보면, 이치의 수하가 벤 것이다.)에 의해 전사하면서, 본인의 무력 밸런스가 상당히 묘해졌다. 드라마 중반인 97회(2차 [[나주 공방전]]의 와중)에서 난전 중이긴 하였지만, 유금필과 호각세로 싸우고 그의 팔이라도 베어본 적이 있던 최필이 이치에게 베였던 것이다. 사실상 드라마에서 무력 밸런스의 배려가 부족한 것도 있으며, 또는 [[후백제]]군의 몇몇 장수들이 일찌감치 하차하고 안 나온데에 따른 영향도 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무력에 있어서는 최필보다 아래로 여겨지는 박영규는 이치와 호각으로 싸운 탓에 박영규가 유금필 급이 아니냐는 뉘앙스가 나왔었다.]하였으나, 임성군(현재의 [[예산군]])을 가던 중에 견훤을 태운 마차 바퀴가 빠져 최필의 희생이 무의미하게 되어버렸다. 밤을 새우면서 수레를 고쳐 다시 이동하긴 했지만, 얼마 못 가서 이치와 그의 정예 기병들이 추격[* 182회 막판에 최필이 죽기 전에 미끼용 어차를 보내버린 바람에 이치가 추격했는데, 얼마 못 가서(183회 초반) 어차는 넘어졌고, 그 어차가 비어 있을 뿐 아니라 그 방향이 자신들이 아는 금강 쪽인 것을 안 이치가 견훤이 탔던 낡은 수레가 진짜라는 것을 알고, 즉시 뒤쫓게 되었다.]을 받으면서 박영규와 남아있던 병사들이 막는 동안, 견훤과 최승우, 금강은 수레 대신 말을 타고 빠져나가는데, 이 와중에 종군을 하던 의원(전의) 훈겸이 낙마를 하였고, 수풀 속에서 피하다가 추격군 중 하나이던 이치의 수하에게 베이고 죽었다.[* [[고려사|사료]]에서는 [[최필]]과 훈겸, 두 사람은 포로로 잡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사실 종훈도 대충 잡히고 안 나왔는데,제작비 절감을 위한 눈물겨운 고육지책~~] 이후, 임성군 경계에서 살아 돌아온 박영규를 맞으면서 "전의 훈겸이는?"이라고 묻는 견훤에게서 회한이 밀려오는 모습도 보였다. 이후, 나레이션에서는 이 전투가 견훤의 생애 마지막 전투라고 하면서 부상을 당한 채 돌아가는 병사들과 군졸 차림의 최승우, 박영규, 금강이 뒤에 있으면서 가마에 탄 채로 추위에 떠는 견훤을 데리고 쓸쓸히 회군하는 후백제군과 백성들의 환호를 받으면서 황도로 개선하는 왕건과 고려군의 상반된 행보를 비춰주면서 이 전투가 후백제가 멸망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는 학계의 분석을 제시하였으며, 이후 운주(지금의 홍성군)와 웅주(지금의 [[공주시]]) 일대의 고을들이 다시 고려에 투항[* 이들 지역은 과거 웅주성에 있던 이흔암의 모반을 하려고 성을 비우고 나가면서, 후백제로 붙은 지역들이다.]하였다고 전해준다. 또한, 고려에서는 이 전투의 공신인 이치에게 [[전의 이씨|전의를 본관으로 하면서]] 이름을 '도(悼)'라고 내렸으며, 관작과 [[시호]]까지[* 그런데, 살아있는 사람에게 시호까지 내린 건 고인 취급을 한 꼴이니만큼 고증에 어긋난다. 다른 사람들도 [[장화왕후 오씨]]가 살아있는 상태에서 장화왕후 시호를 받는 등 여러모로 시호 관련 고증은 좀 이상한 편이다.] 주면서 공신들을 치하하는 장면과, 태자들을 부르면서 승계에 있어서 진지하게 생각하려는 견훤의 모습을 비춰주면서 마무리지었다. 사실 엄밀히 따지자면 견훤이 참여한 마지막 전투는 [[일리천 전투]]이나 [[후백제]]의 왕으로서의 마지막 전투라고 한다면 아주 틀린 나레이션은 아니다. 어찌되었든, 드라마에서 이 전투는 견훤이 금강에게 후계를 전할 결심을 굳히는 계기로 묘사가 되었다. 사실 견훤은 등창이 악화되면서 혼절을 할 정도로 건강이 안 좋았으나, 전세 역전에 필사적이었던 견훤은 전의 훈겸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고집을 부리며 억지로 전장에 나선다. 하지만, 견훤의 상태에 우려를 표하거나 친정을 반대하던 금강, 최승우, 박영규 등과는 달리 신검, 양검, 용검 세 아들들은 친정을 반대하기는커녕 아버지의 건강을 걱정하는 모습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신검이 견훤의 의지를 맹목적으로 따르는 것도 아닌 것이, 극도로 쇠약해진 견훤이 결국 고집을 꺾고 회군을 명령하자, 이번엔 신검이 고집을 부리며 회군을 반대하기도 하였다. 결국 맹추위가 몰아치고 [[고려군]]은 어찌하고 있는지 명확하지 않은 상황에서 [[후백제]]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야영지에서 나흘씩이나 머물었고, 운주에 들어서는 사기가 떨어져 제대로 된 전투조차 치르지 못했으며, 이는 결국 운주 전투의 참패로 이어지게 된다. 결국, 겨우 살아 돌아온 [[견훤(태조 왕건)|견훤]]은 황제이기 이전에 아버지인 자신의 안위를 전혀 신경쓰지 않고, 황위에 욕심만 가득한 신검에게 보위를 물려준다는 생각을 완전히 버리고 [[금강(태조 왕건)|금강]]을 자신의 후계자로 삼을 결심을 굳히게 된다. 운주 전투 이후 이 드라마의 회차(184회~190회)는 상당수 장면이 [[고려]]쪽보다는 [[후백제]] [[신검(태조 왕건)|신검]]의 왕위 쟁탈전, 신검에게 붙는 신료들, 장수들 쪽으로 많이 보여주게 되었다. [각주] [[분류:후삼국시대/전투]][[분류:홍성군의 역사]]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